-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으로 보이는 거리와 보이지 않는 거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의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 그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그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누군가는 가까이 있어도 닿지 않는 사람이고, 누군가는 멀리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늘 가까운 사람이라고.
지연은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단순히 몇 걸음의 거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매일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면서도 평생 가까워지지 않고, 어떤 사람은 몇 번의 대화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지연이 민준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 마주쳤던 날, 민준은 수십 명의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고, 지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날도 지연은 평소처럼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이라 강의실 안은 비교적 조용했고, 몇몇 학생들이 들어와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연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며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수업 많이 어렵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지연이 고개를 돌리자 낯선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 어색한 듯 웃으며 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저도 오늘 처음 듣는 수업이라서요.”
그 남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구나. 괜히 긴장했네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민준이에요.”
지연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지연이에요.”
그 대화는 아주 짧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연은 몰랐다. 그 짧은 인사가 앞으로 자신의 기억 속에서 꽤 오랫동안 남게 될 인연의 시작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히 같은 강의를 듣는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수업 시간에 가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고, 강의가 끝나면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나가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민준이 다시 말을 걸었다.
“지연 씨, 혹시 오늘 과제 설명 이해했어요?”
지연은 노트를 넘기며 말했다.
“대충은요. 그런데 조금 헷갈리긴 해요.”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혹시 같이 정리해 볼래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강의가 끝난 뒤 학교 앞 카페에 들러 과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수업 이야기만 하다가 점점 다른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같은 가벼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지연은 그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준과 이야기할 때는 어색한 침묵이 거의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가끔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공부를 하기도 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캠퍼스를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민준은 밝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일에도 쉽게 웃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연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농담으로 지연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지연은 원래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준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긴장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캠퍼스 안쪽 길을 걷고 있었다.
봄이 막 시작된 시기였고, 나무들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학교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지연아.”
“응?”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강의실에서 과제 얘기했던 날?”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는 그냥 같은 수업 듣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지연이 웃으며 물었다.
“지금은?”
민준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은… 그냥 편한 사람.”
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지연이 민준과의 시간을 조금 더 특별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 캠퍼스에 들어왔을 때는 모든 시간이 길게 느껴졌지만 어느 순간 졸업을 준비하는 시기가 다가와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준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학교 근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늦은 봄의 바람이 천천히 불고 있었고,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지연아.”
“응?”
“나 다음 달에 외국 나가.”
지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갑자기?”
민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꽤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
지연은 잠시 커피잔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얼마나 있어?”
민준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그날의 대화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도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조금 복잡한 감정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 뒤 민준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지연은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다.
출국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 누군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민준이 말했다.
“잘 지내.”
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 말은 아주 짧은 인사였지만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갑자기 아주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비행기가 떠난 뒤 지연은 공항 창가에 한동안 서 있었다.
지연은 그때 문득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민준은 이제 아주 먼 곳으로 떠났지만, 지연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지연은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 닿는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같은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거리는 여전히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연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다.”
그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 지연의 마음속에서
너에게 닿는 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로맨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사랑했던 이유 (0) 2026.03.24 두 번째 첫사랑 (0) 2026.03.23 사랑을 배우는 시간 (0) 2026.03.22 네가 있는 풍경 (0) 2026.03.21 오늘도 너를 생각한다 (0)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