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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마지막 약속로맨스 소설 2026. 3. 19. 22:48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한다. 내일 다시 만나자는 가벼운 약속도 있고, 언제까지 함께하자는 깊은 약속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거창한 말이 아닐 때가 많다. 오히려 평범한 말 한마디, 조용히 나눈 약속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특히 어떤 약속은 그 순간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이 마지막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지연과 민준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은 늦가을 저녁이었다. 낮에는 따뜻했던 햇살이 사라지고 나자 공기가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해가 일찍 지는 계절이라 아직 저녁 식사를 할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이미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길 위에는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연은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대학 시절부터 두 사람이 자주 오던 장소였다. 학교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나오는 작은 공원이었는데, 특별히 유명한 곳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시험이 끝난 날에도 이곳에 왔고,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에도 그냥 걸으러 오곤 했다.
지연은 손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원 안쪽에서는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천천히 이어지고 있었고, 멀리서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민준이었다.
민준은 코트를 입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지연을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연아.”
지연도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왔네.”
민준이 벤치 앞에 서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민준은 벤치 옆에 앉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흐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길 위를 굴러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낙엽 위에 비치며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지연이 먼저 말했다.
“날씨 많이 추워졌네.”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잠시 후 민준이 덧붙였다.
“이제 겨울 오려나 봐.”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흐른 뒤 민준이 말했다.
“지연아.”
“응.”
“우리 여기 진짜 많이 왔지.”
지연은 공원 안쪽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이 가로등 아래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게.”
지연이 조용히 말했다.
“대학 때부터 왔잖아.”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시간도 많았는데.”
지연도 조금 웃었다.
대학 시절 두 사람은 이 공원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난 날 밤에 함께 걸었던 기억도 있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몇 시간을 걷던 날들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졸업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같은 이야기였다.
그때는 미래가 멀게 느껴졌고,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민준이 다시 말했다.
“지연아.”
“응.”
“나 다음 달에 떠나.”
지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민준은 해외로 긴 출장을 가게 되었고, 몇 년 동안 돌아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지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거야.”
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많았지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지연아.”
“응.”
“우리 그동안… 잘 지냈지?”
지연은 조금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그런 말 왜 해.”
민준이 말했다.
“그냥.”
잠시 후 민준이 덧붙였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지연은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힘들 때 항상 옆에 있어 줬잖아.”
지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도 그랬잖아.”
민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 해.”
지연이 물었다.
“어떤 생각?”
민준이 말했다.
“우리 조금만 더 일찍 솔직했으면 어땠을까.”
지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말을 더 이어가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민준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조금 걸을까?”
지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공원 산책로를 걸었다. 낙엽이 밟힐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공기가 숨결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민준이 말했다.
“지연아.”
“응.”
“우리 약속 하나 할래?”
지연이 물었다.
“무슨 약속?”
민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각자 잘 살기.”
지연은 조금 웃었다.
“그게 무슨 약속이야.”
민준도 웃었다.
“그래도 약속이야.”
잠시 후 민준이 다시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도 후회 없게.”
지연은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민준이 덧붙였다.
“그때 서로 괜찮은 모습으로 만나자.”
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은 공원 입구까지 다시 걸어 나왔다.
민준이 말했다.
“나 이제 가볼게.”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민준이 말했다.
“약속 기억해.”
지연이 대답했다.
“너도.”
민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멀어져 갔다.
지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다시 길 위를 굴러갔다.
지연은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어떤 약속은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기억 속에 오래 남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지연은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오늘의 이 순간을 잊지 않겠다고.
이것이 바로 너와 나의 마지막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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